2012년 1월 2일

전날 늦게까지 원정을 간다는 설렘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 일찍 알어나 평소와 다름없이 식사를 하고 여권과 옷가지들을 작은 손가방에 챙겨서 집을 나왔다.

비행기 안에서 신발을 신고 있기에는 답답할 것 같아서 슬리퍼를 신어야겠는데 날은 춥고 신발과 슬리퍼를 모두 가져가면 안 그래도 만성 공간 부족에 시달리는 내 배낭이 터질 것 같아 한참 고민하다 슬리퍼만 신고 나갔다.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갔지만 바깥공기가 쌀쌀하여 이내 후회가 되는 날씨였다. 옷을 두껍게 입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을지로의 원정준비 사무실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밖을 구경하고 있노라니, 미국을 거쳐 아르헨티나로 간다는 것이 더욱 실감이 나지 않았다.

도착하려고 했던 시간보다 의도치 않게 버스가 일찍 도착하여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을지로에는 밤을 꼴딱 샌 지훈이가 자고 있었다. 그 후로 두 번째로 지욱이가 도착하였고, 마지막으로 재문이형이 도착하였다.

아홉시에 재문이형이 같이 남미 여행책자를 사러가야겠다고 헌책방에 같이 가자고 하여 같이 길을 나섰다. 길을 나서니 여전히 춥고 곧 출국한다는 마음에 평소와 다름없는 길거리도 달라 보인다. 헌책방에 도착하여 여행책자를 찾아보니 쓸데없는 책만 즐비하고 결국 헛걸음만 하고 말았다.

사무실로 돌아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용달차가 도착하였다. 12개의 무거운 카고를 용달차에 낑낑거리면서 실었다. 짐을 싣고 사무실에 헉헉거리며 올라왔는데 갑자기 재문이형이 나와 지욱이 둘이서 공항까지 타고 가라고 한다. 밖에서는 용달기사가 빨리 내려오라고 클락션을 울리고 야단이다. 급히 싸둔 어택을 잡아들고 나갔다. 비좁은 조수석에 나와 지욱이 둘이서 들어앉아 타고 갔다. 시속 140킬로미터로 달리는 용달차 안에서도 용달차 아저씨는 한손으로 운전을 하며 나머지 한손으로는 태연히 다른 고객들의 주문을 받고 있었다. 안전벨트도 없는 자리에 앉은 나는 달리는 내내 불안에 떨어야 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짐을 밖에 있는 카트에 싣고 공항 안으로 들어갔더니 학재형께서 이미 와 계셨다. 그 후 재문이형과 지훈이가 어떻게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도착하였고 마지막으로 상세형께서 평소 즐겨 입고 다니시는 등산복 차림으로 공항에 도착하셨다. 출국 수속을 밟으려 긴 줄을 서고 있는데 우리들의 회장님이신 인석이형을 비롯해서 기섭이형 등 형들께서 배웅을 나오셨다. 월요일 아침에 바쁘실 텐데도 나와 주셔서 정말 고마웠다.

마중을 나오신 형들과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하였다.

비행기가 뜰 때 엄청난 가속력이 느껴지면서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아르헨티나라는 타지에 대한 동경과 기대, 아콩카과에 대한 두려움 등. 비행기 안에서는 양옆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둘 다 외국인 여자들이라 대화를 포기하고 휴대폰에 넣어놓은 드라마를 보았다. 드라마를 보고 잠을 자니 어느새 LA에 도착한다고 기장이 방송을 한다. 옆에 있는 창문으로 슬쩍 풍경을 보니 황토색 산맥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이것이 내가 본 아메리카 대륙의 첫 모습이었다. LA공항에 도착하여 입국 인터뷰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지욱이가 옆자리에 앉았던 말레이시아인 여자아이와 신나게 대화를 하고 있다. 10시간이 넘는 동안 상세형이 아무 말도 안하고 무뚝뚝하게 있으니까 많이 답답하여 그 말하고 싶은 욕구를 지욱이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재문이형은 줄 뒤에 서 있다가 협찬 받은 K2 패딩을 비행기에 두고 와서 비행기로 패딩을 지훈이와 찾으러 갔다 온다. 미국 입국 심사관에게 아콩카과에 올라간다고 말했더니 올라가봤자 내려갈 거 뭐 하러 올라 가냐고 농담을 던진다. 미국사람들 특유의 유머인가 보다 하고 당신 말이 맞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인터뷰를 통과하고 짐을 찾았는데 재문이형과 지훈이는 아직도 보이지 않았다. 오겠지 하고 나와서 기다리는데 몇 십분이 지나도 오지 않아 환승수속을 별 수 없이 우리끼리 밟고 있는데 다행히 만나서 환승수속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되었다. 비행기에서 내린지 2시간이 채 되지 않아 이번에는 LAN항공을 타고 비행한다.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니 대한항공 최신예 A380과는 다른 낡은 비행기였다. 큰 덩치의 LAN항공 조종사 아저씨가 올라! 라고 반갑게 인사해준다. 많이 피곤하여 자버렸다. 자다가 음식냄새에 일어나보니 승무원들이 기내식을 승객들에게 주고 있다. LAN항공의 기내식은 또르뗄리니와 비프가 준비되어있다고 여승무원이 친절하게 말해준다. 나는 지훈이와 같이 하계에 추억 때문에 또르뗄리니를 주문했는데 소스가 없이 밍밍하여 바로 먹자마자 후회하였다. LAN항공의 기내시설은 대한항공보다 좋지 않았지만 서비스나 기내식은 괜찮았다. 비행기 화면을 보니 A380은 최고 시속일때 1200킬로미터가 나오는데 이건 900킬로미터 정도 나온다. 지욱이가 그렇게 무서워하는 지욱이의 친누나가 살고 있다는 페루의 수도의 공항에 비행기가 들렀다가 다시 칠레의 산티아고 공항으로 비행을 시작한다. 이때쯤 되니 비행기에 탄 사람들은 모두 히스패닉 계열이다. 우리가 앉은 좌석 오른쪽에 있던 예쁜 여자가 속이 비치는 옷을 입고와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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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하여 ARS라는 공항내 카페에서 식사를 하다가 종팔이 형을 만났다. 드디어 멤버 전원이 모인 것이다. 식사는 너무 짜고 물기가 없어 식사하는 내내 콜라를 엄청 들이켜야 했다. 식당에서 와이파이가 되어 와이파이를 켰더니 신기하게도 한국과 통신이 된다. 친구들과 엄마에게 사진을 전송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공항 1층으로 내려갔더니 버스 회사가 있어 바로 버스를 예약하고 버스를 타고 버스터미널로 갈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공항에서 버스 터미널로 이동하였는데 이국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휴대폰과 카메라를 양손에 잡고 창문너머로 셔터를 눌러대었다. 산티아고는 칠레의 수도이지만 정말 변변찮은 빌딩 하나가 없었다. 남미는 지금 여름이라 햇빛이 뜨거웠는데 습기가 많지 않아 그리 덥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처럼 찌는 듯한 더위가 아니다.

버스터미널에서 다시 멘도사에 가는 버스를 탔다. 칠레에서 아르헨티나로 국경을 넘어가는 버스이기 때문에 타기 전에 여권을 보여 줘야한다. 버스에 타니 사람들은 별로 없었고 버스 아저씨가 Tur-Bus 라고 씌여진 봉지를 승객들마다 하나씩 건네준다. 봉지에는 음료수와 과자가 들어있다. 버스가 출발하고 산티아고를 벗어나서 도로를 달린다. 이곳의 도로는 1~2차선밖에 없는 것 같다. 산티아고가 작은지 바로 시가지를 벗어나서 버스가 달리는데 버스 밖의 풍경으로 산들이 보인다. 우리나라 산과는 다르게 민둥산과 다름이 없는 산들이다. 건조한 기후라 그런지 몰라도 바위산에 말라비틀어진 나무들이 듬성듬성 박혀있는 꼴이다. 칠레는 도로 옆에 바위들과 절벽이 있어 낙석의 위험이 딱 봐도 아주 큰 구간에도 아무런 안전시설을 설치해 놓은 것이 없었다. 특히 안데스 산맥을 돌아 올라가는 도로에서도 철제 가드레일조차 없어 운전사가 실수하는 날에는 바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이어서 타고 가는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옆에서 지욱이가 에콰도르에서도 이런 도로가 많아서 일 년에 몇 번씩은 도로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는다고 한다.

한 시간 반 정도 달리니 저 멀리 눈에 덮인 봉우리들이 보인다. 저곳보다 높은 봉우리에 올라간다고 생각하니 막막하다. 이내 버스는 국경에 도착하였다. 버스 아저씨가 사람들을 입국심사대로 안내한다. 먼저 칠레에 출국도장을 받고 아르헨티나 측에 입국도장을 받는다. 우리가 탄 버스의 사람들에게 입출국 사무소 직원들이 출국도장과 입국도장을 찍어주는 것만으로도 한 시간 넘게 소요되었다. 우리가 낮에 버스를 타고 가서 그런지 웬일인지 엄하다던 짐 검사는 하지 않았다. 덕분에 한국에서 가져온 식량을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다. 상세형께서 매우 좋아하셨다.

출입국 심사를 마치고 바로 버스가 다시 출발하였다.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재문이형이 여기가 바로 페닌텐테스라고 하였다. 페닌텐테스는 우리가 이틀 후 묵을 곳인데 입출국 사무소에서 별로 멀지 않나 보다. 갑자기 피곤이 밀려와 눈을 감았다 떴더니 멘도사 버스터미널이다. 멘도사 버스터미널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어마어마한 짐을 내리고 차를 즉석해서 수배하여 한국에서 재문이형과 지욱이가 힘써서 예약한 Hostel suites Mendoza에 도착하였다. 호스텔 안까지 카고 14개를 다 옮겨놓고 체크인을 하였다. 나는 당시 손가방을 들고 있어서 손에 계속 들고 다니기 짜증나 손가방을 어택에 넣어둔 상태였는데 어택도 카고 더미에 올려놓았다. 호스텔 안이고 카고 더미를 우리 일행이 보고 있으니 안심한 상태였다. 그렇게 어택을 더미위에 올려놓고 체크인 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문득 그래도 중요한 물건들이 들어있으니 어택을 메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뒤를 보려는 찰나 뒤에서 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내 어택이 보이지 않았다. 예감 상 좋지 않은 느낌이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호스텔 안에서 어택이 없어지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짐 더미에 파묻혀 있나 찾아봤는데 역시나 없었다.

학재형이 확실하게 보지는 못했지만 누가 가방을 채간 것 같다고 하셨다. 급하게 밖으로 뛰어나갔더니 내 어택을 가져간 놈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아르헨티나 땅을 밟은 지 세시간만에 일어난 사고였다. 어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떨떠름하고 실감이 나지 않고 화가 나고 짜증이 솟구쳤다.

형들한테 여권관리 물건관리 못했다고 쥐어 터질까봐 두려운 감정이 들었고, 도둑놈에 대한 분노와, 내 자신에 대한 후회, 그리고 나에 대한 걱정, 앞으로의 뒤처리에 대한 고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 인생에서 그렇게 여러 가지 감정이 복잡 미묘하게 섞인 느낌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어택을 잃어버리자마자 나 때문에 앞으로의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은 당연했다. 내가 여권을 도둑맞음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화가 날지 상상이 갔다. 애써 태연한척 하고 있지만 알 수 있었다. 분명히 나에게 일행 모두 화가 났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여러 가지 감정들이 스쳐지나 가겠지. 먼저 호텔 직원한테 경찰을 불러달라고 하고 어택에 있던 것들을 기억해 보았다.

어택에는 산에서 한 번도 이용해 보지 못한 마무트 헤드랜턴과 오클리 고글, 동대문에서 내가 직접 샀던 티셔츠와 가디 건, 속옷, 지갑, 이중화, 그리고 여권이 들어있었다. 30분후에 경찰이 도착했다. 호스텔 측에 CCTV를 보여 달라고 했는데 사장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보여주지 않는다. 결국 CCTV를 보는 것은 포기하고 경찰들과 함께 경찰서에 가게 되었다. 고맙게도 지욱이가 동행해 주었다. 한국에서 평생을 살아도 한번 안 가본 경찰서를 아르헨티나 땅에 들어간 지 4시간 만에 가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경찰서는 호스텔에서 차로 10분이내의 거리에 있었고 아르헨티나의 경찰서는 후줄근하였다. 10분정도 나랑 지욱이를 밖에 앉아있게 하더니 나보고 들어오라는데 나는 스페인어를 못하고 지욱이는 스페인어 네이티브라고 하자 조서 쓰는 데는 한사람만 있어야 한다고 지욱이만 데려간다. 일을 당한 사람은 나인데 지욱이가 조사받는 웃긴 상황이었다. 나는 방밖에서 길다란 나무의자에 앉아 온갖 잃어버린 어택에 대한 잡생각을 하며 주위를 멍청히 둘러보는 것 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CCTV를 확인해서 범인을 잡을 수 있을까? 라는 희망을 가져보기도 하고 머릿속이 매우 복잡했다. 아르헨티나 경찰관은 친절하긴 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그들은 조서만 작성하고 CCTV를 확인하려는 노력조차 없이 나와 지욱이를 호스텔에 내려주고 가버렸다. 호스텔로 돌아오는 경찰차 안에서 남자 경찰관에게 한국어 욕을 몇 가지 알려주었다. 욕을 가르쳐 주니 좋다고 곧잘 따라한다.

경찰서에 가있는 동안 형들께서도 내 문제에 대해 대책을 세워놓으셨는지 우리가 경찰서에 서 돌아오자마자 부르셨다. 나는 여권을 잃어버려 여권을 만들어야 되기 때문에 정상에 갈 수 없다고 상세형이 말씀하셨다. 마음속으로 참 참담했다. 저질러 놓은 일이 있으니 비싼 항공권이 날아갈 수 있는 리스크를 무릅쓰고 정상갈 기회를 달라는 염치가 못되었다.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되는 것은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대사관에 전화하고 내일 어떻게 문제를 처리할지 재문이형과 의논하기 위해 재학생들이 쓰는 방으로 가서 샤워를 하고, 재문이형과 내일 대사관에 전화를 해서 여권문제를 어떻게 해야 해결해야 하는지 알아봐야겠다고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상세형께서 갑자기 들어오셨다. 자고있을줄 알았는데 안자고있다고 다시 형들 방으로 오라고 하셨다.

지훈이와 지욱이는 자고 있었는데, 둘을 깨워서 같이 형들 방으로 갔다. 눈치를 보니 형들께서는 이미 결단을 내리신 것 같았다. 상세형이 말을 꺼내셨다. 고맙게도 나에게 선택권을 주신다는 것이었다. 여권문제는 나중에 해결하고 등반을 최우선적으로 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상세형이 칠레 면세점에서 사오신 앱솔루트 보드카를 한 사발 내미셨다. 복잡한 마음에 쭉 들이켰다. 소주를 3배 농축시킨 것 같은 쓴맛과 구역질이 났고 술은 너무나도 미지근했다. 하지만 내 정신을 조금이라도 풀어줄 방법은 이것밖에는 없었다. 술이 용암처럼 식도를 타고 위장까지 스멀스멀 흘러가는 것이 느껴진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빈속에 독한 술을 쭉 들이켜서인지 벌써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지훈이가 담배를 피우면서 느낀다는 세상이 긍정적으로 변한다는 감정. 나는 그 감정을 술의 힘을 빌려 느끼고 있다. 선택의 순간이 왔다. 여기까지 와서 아콩카과 정상을 가보는 기회조차도 허무하게 박탈 당하는 것이 너무 화가 나고 미치겠어서 등반하기를 결정하였다. 취기가 올라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막연한 대책 없는 나의 호기였다. 마침 재문이형 친척 분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살고계서서 그분들의 도움을 받기로 하였다. 형들은 내 대답을 듣고 이야기를 더 하시더니 들어가 자라고 하셨다. 나와 재문이형은 호스텔에 있는 1층 컴퓨터 이용공간으로 가서 인터넷으로 여권 발급에 필요한 것과 아르헨티나 주재 대사관의 전화 번호 등을 알아내고 방에 들어가 잤다.

새벽 3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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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자 내가 처한 현실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기분이 급격히 안 좋아지면서 하루가 시작되었다. 호스텔에서는 아침을 주기에 아침을 먹으러 내려갔다. 아침은 셀프였는데 그럭저럭 먹을 만 했다. 아침을 먹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한국 대사관에 전화를 하여 여권발급에 필요한 것들을 다시금 확인하고 오늘 저녁에 버스를 타고 출발하기로 하였다. 여권을 새로 발급 받으려면 경찰서에서의 조서와 여권사진과 잃어버린 여권의 사본이 필요하다고 하기에 오늘 내가 할 일은 그것이었다. 지욱이가 호스텔 앞에 바로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인쇄점이 있다고 알려주어 나는 바로 앞에 있는 인쇄점에 갔는데, 영어로 조서를 가리키면서 copy! copy! 하고 손가락으로 7을 보여줬더니 오케이 하며 복사해준다. 다행히 여권을 스캔해둔 파일이 내 이메일에 있어서 인터넷으로 내 사진을 다운받아 복사를 하려고 했더니 컴퓨터 성능이 후져서인지 이미지가 깨져 나온다. 결국 주인장을 닦달해 그곳에서 제일 좋은 컴퓨터로 다운로드 하였더니 이미지가 제대로 나온다. 그렇게 여권 사본과 조서를 복사한 후 호스텔로 돌아가니 형들은 외출준비를 하고 계셨다.

입산허가를 받으러갈 차례다.

입산허가를 해주는 곳은 우리가 묵었던 Hostel suites Mendoza에서 걸어서 한 10분에서 15분정도 걸리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아콩카과를 등반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입산허가를 받기 위해 모여 있었다. 서류는 입산신청서와 각서 2가지만 쓰면 되었다. 작성하는데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렸다. 우리가 입산허가서를 작성하여 직원에게 주면 거기에 있는 여직원이 입산허가서를 직접 타이핑하여 서류를 처리한다. 그 작업이 또 상당히 오래 걸리고 마지막으로 입산허가증이 프린트 되어 나오는데, 거기에다가 본인의 서명이 필요하다. 나와 지욱이는 그 사이에 내 여권사진을 찍기로 하였다. 사진관을 힘들게 찾아 들어갔지만, 웬걸 점심시간이기 때문에 사진기사가 밥 먹으러 갔다고 한다. 언제 점심 먹고 돌아오냐고 하니까 지욱이가 5시에 돌아온다고 한다. 점심시간이 5시간이라니 하도 어이가 없어서 도대체 왜 점심시간이 5시간이나 되냐 지욱이에게 물어봤지만 원래 이곳은 점심시간이 길다고 한다.

할 수 없이 형들과 같이 멘도사 시내로 들어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였다. 밥을 먹는 도중 재문이형과 우리가 일처리가 늦었다고 형들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재문이형은 내 여권문제 때문에 업무량이 2배 이상 늘어나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나 때문에 혼이 나서 내가 정말 미안했다. 우리가 입산허가 받으러 호스텔에서 입산허가소로 갈 때는 사람들이 길거리에 바글바글했는데 12시가 지나자 낮의 신데렐라처럼 사람들이 썰물같이 빠져나가 거리가 매우 한산해진다. 아마도 식사를 하며 오후의 여유를 즐기고 있으리라. 거리의 상점들은 반절이상 문을 닫고, 식당들만 영업을 한다. 여기 와서 보면 아르헨티나에서 제일 열심히 일하는 곳 중 하나는 레스토랑이다.

식사를 마치고 지훈이와 형들은 까르푸로 식료품들을 사러 가셨다. 재문이형은 레스토랑에서 상세형이 뮬라 계약을 빨리 끝내놓으라고 하셨기 때문에 식사가 끝나자마자 급하게 움직였다. 나는 오늘 저녁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가기로 하였기 때문에 어서 못 찍은 사진을 찍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대사관의 위치를 다시금 인터넷으로 확인하였다. 이윽고 갈 시간이 되자 재문이형과 지욱이가 버스터미널까지 동행하여 버스표를 끊어주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영어를 잘 하지 못해서 버스표 하나 끊는데도 지욱이가 있어야 될 정도다. 작별인사를 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넓고 편안했다. 아르헨티나에서 딱 하나, 한국보다 나은걸 본 것이 바로 버스이다. 밤이라 창밖의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곧 차 안에서 음식을 준다. 음식은 그저 그랬다. 햄은 짜고 맛없었다. 먹으라고 준 것 중 빵밖에 먹을 수가 없어서 빵만 먹고 버렸다. 음식을 먹고 나니 갑자기 피곤이 몰려와 잠에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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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ECHA BUS“ 내가 타고 가는 버스회사의 이름이다. 나는 오늘 이 버스 안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버스 안에서 일어나 보니 이미 날은 밝았고 창밖으로 도로 너머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져있다. 한국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지평선이다. 드문드문 말과 소도 보인다. 언제 다시 보게 될 광경일지 몰라 잘 감상해 두었다. 버스에서는 또다시 아침을 주려고 한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아침을 든든히 먹을 줄 모르나 보다. 아침으로 크래커와 달디 달은 싸구려 마쉬멜로우로 범벅이 된 과자를 준다. 과자는 버리고 크래커와 커피로 아침을 때웠다. 그렇게 식사한 후 한 시간여를 달려 중간 역에 도착하고 또 한 시간여를 더 달려 드디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칠레의 산티아고와는 달리 수도라는 느낌을 확실히 받을 수 있는 위용이 있었다. 고층빌딩들도 많고 차도 많았다. 드디어 부에노스아이레스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였다. 버스에서 내리니 나를 맞아 주시기로 한 재문이형 외가 친척 분들이 나와 계셨다. 일면식도 없는 나를 도와주시기 위해 이렇게 나와 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했다. 피가 섞인 재문이형은 정작 한 번도 본적이 없다는 분들인데 엉뚱하게도 내가 재문이형 대신 친척 분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버스터미널에 11시쯤 도착했는데 대사관이 1시까지밖에 업무를 하지 않고 나는 5시 버스를 타고 돌아가야 되어서 바로 택시를 타고 대사관으로 갔다. 대사관에서 서류를 작성하고 사진을 냈더니 옷이 흰색계열이라고 다시 찍어오라고 한다. 에휴! 이제는 사진까지 나를 엿먹이는구나...라고 생각을 하면서 다행히 근처 사진관이 있어 거기서 다시 사진을 찍고 제출했다.

대사관에서의 일이 다 끝나자 재문이형 외할아버지께서 집에 초대해 점심을 대접해주셨다. 거기서 재문이형 외할아버지에 대해서 조금 알 수 있었는데 아르헨티나에서 18기라는 무술을 가르쳤던 분이셨다. 게다가 한인회 총재까지 하고 계시는 분이었다. 이민 오신지 30년이 넘어 이제는 아르헨티나가 한국보다 좋다고 하신다. 한국 사람들은 약았고 (돈 계산이 빠르고 여유 없이 사는 것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순박하다고. 오기 전에 아무 생각 없이 아르헨티나 음식이 내 입맛에 안 맞는다고 말했었는데 그걸 듣고 한국식을 차려주신 배려에 너무 감사했다. 이제 갈 시간이 되어 내 여권을 대리수령해주고 물심양면 도와준 영석이형과 같이 집을 나섰다. 아르헨티나 지하철을 한번 타보고 싶다고 하니까 흔쾌히 지하철로 버스터미널까지 이동하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하철이 100년이 넘었다고 하더니 아직도 A호선은 100년 전 열차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약간 어이가 없었다. 열차에게 엄청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신기하고 좋은 구경거리 이었다. 역과 역사이의 간격이 매우 짧아 열차가 10초정도 달리고 역마다 멈춰 선다. 역에 도착하여 밖으로 나가는 계단으로 올라가려는데 대합실 내의 연기가 자욱하다. 영석이형 말로는 이게 대마초 연기란다. 신박한 경험이었다. 버스터미널로 가서 버스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영석이형이 카페에서 맥주를 사주셔서 맥주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버스 타는 것까지 도와주시고 진짜 잊을 수 없는 도움을 주신 형이다. 엄청 감사하다. 오늘 여권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멘도사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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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보니 여전히 버스 안이다. 이 버스 회사도 아침을 부실하게 커피와 과자로 해결하게 한다. 아침 8시에 버스가 마침내 멘도사에 도착했다. 이제 멘도사 버스터미널은 너무나 친숙해졌다.

이제 내 힘으로 모두가 기다리는 페닌텐테스까지 가야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떠나기 전 지욱이가 페닌텐테스로 가는 버스를 운영하는 버스회사를 알아봐 주었는데, USPALLATA라는 버스 회사이다. 아르헨티나의 버스터미널에는 버스회사가 열 댓개 이상은 되고 버스회사 사무실에 직접 들어가 버스표를 끊는 방식이다. 버스표를 끊기 위해 버스회사로 찾아가 Can you speak English? 한마디 했더니 단칼에 No다. 이럴 줄 알아서 지욱이에게 부탁해 스페인어로 ‘페닌텐테스까지 가는 버스 티켓주세요’ 라고 써놓은 메모를 들이밀자 직원의 안색이 밝아지더니 친절히 바로 티켓을 끊어주고 시간과 플랫폼까지 알려준다. 시간은 영어로 알려준다. USPALLATA에서 버스는 다른 버스와는 달리 페닌텐테스까지 가는 도중에 있는 정류장마다 다 정차했다.

정차할 때마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지 방송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많은 곳에서 정차했기 때문에 결국 나는 페닌텐테스에서 한정류장 떨어진 푸엔테델잉카에서 내리게 되었다.

이미 버스로 이천미터 이상을 올라와있기 때문에 기온이 쌀쌀했고 바람이 휙휙 불었다. 푸엔테델잉카에서 페닌텐테스까지 다시 도로를 통해 걸어갔다. 걸어가는 도중에 바람이 심하게 불어 눈이 자꾸 메말라 고생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도로 옆 언덕에 지욱이와 지훈이가 숨어서 내가 걸어가고 있는 것을 촬영하고 있는 게 내 눈에 띄는 것이 아닌가. 반가움과 알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반반씩 섞여서 그들에게 다가갔더니 갑자기 발바닥이 따가웠다. 이놈들이 하필이면 도깨비풀이 있는 언덕에 있었던 것이다. 슬리퍼를 신고 있어 양말에 도깨비풀들이 다 묻고 난리가 났다. 지욱이와 지훈이가 도깨비풀을 떼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챙겨온 옷가지들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숙소에서 쉬고 있다가 내가 역을 잘못 내려서 마중을 나와야했겠지.

귀찮았을 텐데도 마중 나와 준 지욱이와 지훈이에게 고마웠다. 그런데 지욱이는 꼭 내가 잘못 내려서 마중 나와야 되어서 짜증난다며 툴툴거린다. 지욱이에게 미안한 감정이 반절쯤은 사라졌다.

이렇게 일학년 셋이서 도로를 걸어가니 상세형께서도 마중을 나와 계셨다. 상세형께서 수고하셨다고 해 주셨다. 나도 상세형이 너무나 반가웠다. 이틀 만에 보는건데도. 숙소로 돌아가니 학재형과 종팔이형께서도 반갑게 맞아주셨다. 이렇게 일행을 만나니 마음이 뻥 뚫린 것 같이 후련했다.

아르헨티나의 특산물 고기를 그날 저녁으로 해서 먹었다. 고기는 정말 맛있었다. 고기를 산장 안에서 구우니 외국인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린다. 하도 불쌍해서 고기 달라는 한 놈한테 고기 한 점 주려고 했더니 종팔이형께서 우리 먹어야 된다고 막으신다. 고기 덕분에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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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에 기상하여 밥을 했다. 어제 저녁에 재워놓은 불고기와 산장주인이 주는 빵과 잼, 그리고 즉석 미역국이 아침이었다. 불고기는 학재형이 과다하게 물은 부은 탓에(내 기준으로) 싱거웠지만 맛있게 먹을 만 했다. 그리고 산장주인이 직접 만들어서 주는 빵은 매우 맛있었다. 같이 주는 버터와 잼에 발라먹으면 뱃속에 무진장 들어간다. 산장주인은 옛날 아콩카과에서 가이드를 하다가 다쳐서 산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30대초중반으로 보이던데, 그 소리를 듣고 안타까웠다. 10시에 차가 오기로 하였기 때문에 밥을 먹고 서로 짐을 정리하였다. 어제 저녁에 내 등산화가 없어졌었는데 지훈이가 카고 안에서 찾아주었다. 약속시간보다 시간이 좀 지나서 차가왔다. 이 나라 사람들은 영업을 하는데도 시간을 그리 잘 지키지 않는 것 같다. 차에 짐을 싣고 우리가 계약한 뮬라 회사로 카고들을 옮겼다. 그곳에는 뮬라들이 여러 마리 묶여있고 다른 등반 팀들의 카고백들이 쌓여져 있었다. 카고의 무게제한은 하나당 30킬로그램. 마부는 뮬라 한 마리당 60킬로그램의 짐을 싣는다. 여기서는 무게를 양팔저울로 잰다. 양팔저울이 높은 위치에 있어 무거운 카고를 들어올려서 양팔저울에 매다는 것도 고역이었다. 지훈이는 그러는 와중에 뮬라 똥을 밟는 불상사를 당했다.

그렇게 힘들게 짐들의 무게를 다 재고 타고온 버스로 호르콘네스로 이동하였다. 호르콘네스에서 입산신고를 하는데 거기 여직원이 생일이라고 해서 우리는 여직원이 이뻐서 훈훈하게 생일 축하한다고 축하해주고 기념촬영을 했다.

최종 입산신고가 끝나자 다시 차를 타고 공원 입구로 향했다. 입산신고서에서 공원입구까지는 차로 2분도 걸리지 않는다. 차에서 내리니 드디어 해발2950미터의 표지판이 우리를 반긴다. 그걸 보자마자 정상까지 4000미터를 올라가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 아찔했다. 어택과 스틱을 집어 들고 첫 운행을 준비하였다. 상세형께서 고소가 올 위험이 있으니 절대 자기를 추월하여 운행하지 말라고 하셨다. 상세형은 매우 느리게 운행을 시작하셨다. 천천히 걷는 정도의 페이스. 길은 공원 입구에서부터 아주 완만하고 넓게 시작되어 한국의 산과는 다른 걷는 맛이 난다. 하지만 남미의 햇빛은 매우 뜨거웠다. 해발 3000미터인데도 강렬한 햇빛 덕에 섭씨 30도가 오르락내리락한다. 12시 40분에 첫 휴식을 하였다.

정신을 차리고 앞 너머를 쳐다보니 아콩카과 봉우리가 보인다. 멀리서 눈으로 볼 때는 북한산 보는 듯 한 느낌이다. 거리가 이십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 숨막히게 높아 보이지 않았다. 한 시간여를 운행하니 다리가 나왔다. 티비에서나 보던 케이블 다리다. 괜히 신기하여 사진을 찍었다. 상세형께서는 우리가 다리가 건너는 모습을 촬영하신다며 다 건넌 다리를 다리 되돌아가 다시 건너라고 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다리를 건너고 나서부터 길이 약간씩 험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걷기 좋은 널찍한 길이 아니었다. 계속 같은 풍경이 지나간다. 길을 걷고 있으면 오른쪽에는 산맥들이 있고 왼쪽에는 강이 흘러내려간다. 천천히 운행을 하다보니 다리를 건너서 세 시간 정도 지나 멀리 콘플루엔시아가 보인다.

오늘 우리의 목적지이다. 왼편에 보이는 언덕을 돌아서 넘어가니 도착이다. 4시 20분 도착. 약 4시간 운행이다. 도착하자마자 상세형의 지시로 긴 팔 옷을 꺼내 입고 텐트를 쳤다. 3400미터 고지에 올라오니 이제부터 조금만 힘을 쓰는 행동을 하면 바로 헉헉거린다. 텐트를 치는 것도 힘들다. 속도 안 좋아져 설사를 했다. 무겁지만 형들이 고생하시면서 가져온 10인용 텐트. 을지로 사무실 안에서 꺼내서 쳐봤을 땐 정말 위용이 엄청났는데 밖에다가 쳐놓으니 사무실만큼의 위용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안에 들어가 보니 정말 안이 넓고 쾌적하였다. 일곱 명이 지내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자리를 정리하고 운행을 종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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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콘플루엔시아에서 고소적응을 하는 날이다. 아침을 일찍 먹고 콘플루엔시아에 있는 메디컬 센터에 가 메디컬 체크를 받았다. 산소포화도와 맥박 수, 그리고 혈압을 체크하였는데 아침에 속이 안 좋아 설사를 하여서 걱정하였지만 혈압이 평소 140인데 125로 오히려 떨어져 나왔다. 다행히 모두가 메디컬 체크를 무사히 통과하였다. 우리는 북벽을 통하여 등반하지만 오늘 고소적응과 남벽 구경도 할 겸 플라자 프란시아를 갔다 오기로 하였다. 남벽루트의 베이스 플라자 프란시아는 프랑스 팀이 처음 아콩카과 남벽을 등정하는데 성공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캠프에서 5분정도 걸어가지 갈림길이 나오고 표지판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하나는 Plaza de Mulas 뮬라의 광장이라는 뜻이다. 아콩카과 등반 공식 베이스캠프이다. 하지만 오늘 가지 않는다.

우리는 옆에 씌어진 Plaza Francia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내려와야 되는 길이라 운행하는 맛은 나지 않았다. 고소에 올라가면서 드는 생각은 상세형께서는 언제 운행을 중단할까 라는 생각뿐이었다. 간간히 보이던 식물도 3800미터 고지를 넘어서부터는 씨가 말랐다. 길 옆을 보니 모래더미 사이에서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흘러내린 물은 시내를 형성하면서 흐르고 있다. 위에서 떠내려 온 빙하에 흙과 모래가 쌓인 모레인 지대라고 상세형이 설명하여 주셨다. 저렇게 흙과 모래가 두껍게 쌓이려면 엄청난 세월이 필요할 텐데 그 세월동안 빙하가 녹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재문이형과 지욱이는 운행 도중 우루과이에서 온 청년 가브리엘을 만나 대화를 재미있게 하고 있다. 운행을 한지 다섯 시간정도 지났을까. 모레인 지대를 지나고 나니 등산로 주위에 건조한 날씨로 인해 쩍쩍 갈라진 땅들이 보인다. 플라자 프란시아까지 가는 길은 대체로 붉은 땅이었다. 공사판 자갈더미들을 쌓아놓은 듯 한 길들을 지나다가 쉬는 도중 지루한 운행을 끝마치자고 상세형이 말씀하셨다.

학재형이 더 가자고 말씀하셨지만 상세형의 반대로 하산이 결정되었다. 상세형이 천사처럼 보였다. 올라가는 건 천천히 갔지만 내려오는 건 올라갈 때 2~3배의 속도로 내려갔다. 지욱이는 올라갈 때보다 내려갈 때 힘이 두 배는 더 나는 것 같다. 엄청 잘 내려간다. 올라올 때와는 다르게 내려갈 때는 무질서하게 사람들 나름대로 내려가고 싶은 대로 내려갔다.

나는 뒤에서 천천히 내려갔는데 재문이형이 멈춰 서서 수첩을 잃어버렸다고 찾아야 한다고 다시 올라갈 채비를 하는 것이 보였다. 속으로 4초간 묵념을 해주고 캠프로 돌아왔다. 캠프로 돌아오니 에구구 소리가 절로 난다. 저녁 준비 전 우리들의 요리의 한 축을 담당하고 계시는 학재형께서 아보카도를 나눠 썰어서 나눠주신다. 하나 먹고 텁텁하고 느끼한 맛에 다시 먹지 않았다.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한참 지나도 재문이형이 오지를 않는다. 결국 재문이형은 내가 다른 사람이 캠프에 도착한지 두 시간 후에 수첩을 찾지 못하고 쓸쓸히 귀환해야만 하였다. 저녁은 마지막 남은 불고기였다. 냉장보관을 하지 않아 상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열심히 익혀 먹었다. 내일은 베이스캠프로 가는 고된 일정이라 모두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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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Plaza de Mulas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날이다. 베이스캠프까지의 거리는 콘플루엔시아에서 15킬로미터 정도 된다. 나랑 학재형 종팔이형 지훈이가 선발대로 먼저 출발하였다. 후발대는 상세형, 행정을 맡은 재문이형과 스페인어를 맡은 지욱이가 배정되었다. 후발대는 우리 카고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늦게 출발했다. 출발하여 어제 봤던 표지판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갔다. 베이스까지 8시간. 막막하다. 다리를 건너고 30분정도 운행하자 드넓은 초원이 나왔다. 경사도는 거의 느낄 수 없는 그런 길이 망망대해처럼 펼쳐져 있다. 초원은 1킬로미터 정도 이어져 있었고 그 후로 자갈과 모래로 이루어진 드넓은 평지 같은 길이 이어져 있다. 그렇게 두 시간을 걸으니 마부들이 뮬라를 몰고 우리를 지나쳐 간다. 무거운 짐을 싣고 묵묵히 달려가는 뮬라들을 보면서 타고가고 싶다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길이 아주 완만해 평지나 다름없어 운행속도는 빨랐다. 점심때가 다되도록 그렇게 걷자 이바네즈라는 곳이 나왔다.

거기에는 표지판이 붙어있고 베이스까지 가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바네즈는 콘플루엔시아에서 플라자 데 뮬라스까지의 거리의 절반정도에 위치해 있다. 끝없어 보이는 자갈평지의 끝인 곳이다. 이바네즈에서 행동식을 엄청나게 까먹었다. 또 학재형이 어제 만들어주신 주먹밥을 먹었는데, 약간 짜긴 했지만 맛있게 먹었다. 그게 없었다면 우리 모두 가는 도중 퍼져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휴식을 취하고 난 후 다시 운행을 시작했다. 이제부터 길이 험해지기 시작한다. 운행을 시작하자마자 길에 뮬라 시체가 보인다. 경사도가 조금 올라 운행속도는 점점 떨어진다.

저 멀리 베이스캠프가 보이는데 베이스캠프가 보이고 도착하는데 두 시간 넘게 걸렸다. 베이스 도착하기 30분전 거리에 제일 가파르고 힘든 코스가 있는데, 거기에는 뮬라 시체가 떼거지로 있었다. 아마도 그 가파른 길을 오르다가 미끄러져 굴러 떨어져 죽은 것이리라. 안 그래도 우리가 그곳을 오르고 있을 때 뮬라들이 우리를 지나쳐 올라간다. 길이 좁아 우리는 뮬라가 지나갈 때마다 길 한편으로 비켜줄 수 밖에 없었다. 뮬라도 지쳤는지 천천히 천천히 올라간다. 마부는 뮬라들을 채찍으로, 휘파람으로 처지는 뮬라들을 재촉하며 올라간다. 그렇게 위험하고 가파른 길에서도 뮬라에서 안 내리고 타고가다니 이쪽 마부들은 담력도 좋다. 머릿속으로 오늘 운행은 참 힘이 든다고 절로 생각이 나는 길이다. 드디어 캠프사이트에 도착하여 캠프 체크인을 했다. 3300에서 4300으로 한번에 천 미터를 오르는 것이라 도착하니 몸이 매우 피곤하고 조금만 힘을 써도 매우 힘이 들었다.

우리가 도착하니 이미 카고들이 우리를 어서 옮겨서 정리해 주세요 하고 여행사 앞에 쌓여있다.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토가 나왔다. 상세형의 지시로 카고를 힘들게 힘들게 옮기고 텐트를 쳤다. 카고 하나 옮기고 나서 호흡을 안정시키는데 3분 이상씩 걸린다.

하나 옮기고 털썩 주저앉아 헉헉거리고, 힘들어 죽을 뻔 했다. 텐트를 치는 것도 서로 헉헉 거리면서 쳤다. 텐트를 정리하고 저녁을 하였다. 내일은 쉴 수 있다고 생각하니 텐트에 들어앉아 약간 위안이 되었다. 머리가 아파서 타이레놀 한 알을 복용하고 정신없이 잤다.

밤이 되니 꽤 추워져 고소를 먹지 않으려면 체온유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바지도 두겹으로 껴입고 침낭 안에 콕 박혀서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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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서 갓김치로 아침을 했는데 귀한 갓김치로 찌개를 끓였다고 형들이 경악을 하신다. 우여곡절 끝에 아침식사를 마쳤다. 오늘은 쉬는 날이라 아침을 먹고 다들 약간의 자유 시간을 가지며 11시까지 쉬었다. 형들은 스도쿠 삼매경이다. 스도쿠 삼매경에 빠져 계시다가 우리를 불러 등반계획을 짜신다. 등반계획이 상세형과 학재형 사이에서 척척 나온다.

총 정상까지 7일이 걸리는 계획이었는데 그 계획을 보는 것만으로도 막막했다. 둘째 날 C2까지 갔다가 거기서 잔 후 내려오는 계획이 있는데 힘들게 올라갔던 길을 다시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등반일정에 맞추어서 어제 미처 힘들어서 하지 못했던 카고 정리를 하였다. 카고 정리는 결코 쉽지 않았다. 카고만 14개이다. 카고에 들어있는 물건도 뒤죽박죽이라서 하나하나 까서 식량별, 장비별, 개인별로 정리를 하고 서미트 어택에 필요한 행동식과 장비들을 챙겨서 따로 카고에 때려 넣었다. 행동식만 해도 카고 하나를 무겁게 차지한다. 재문이 형의 지시에 맞춰 정리를 해나갔지만 정리하는 것이 그리 쉽고 빠르게 끝나지 않는다. 카고 정리를 하다 보니 상세형께서 짜파게티를 끓여서 먹자고 하신다. 짜파게티는 근래 들어서 먹어본 것 중 최고였다. 점심을 먹고 조금 쉰 후 다시 카고를 정리하였다. 저녁에 타이레놀 하나를 먹고 자서 어제 약간 있던 두통은 자고 나자마자 말끔히 사라졌지만 조금 빨리 걷거나 힘쓰는 일을 하면 금방 헉헉대는 건 그대로이다. 카고를 정리할 때 산소 부족이 제일 방해가 되었다. 드디어 카고 정리가 끝났다. 카고를 정리하고 움직이기가 싫어 텐트안에 바로 들어가 밖으로 나가는 일을 최소화 시켰다. 한숨자고 저녁을 먹고 다시 쉰다. 쉬면서 많은 생각이 든다. 앞으로 어떤일이 일어날까? 라는 생각과 아메리카 대륙의 최고봉에 대한 경외감. 고산병에 대한 두려움.

열심히 상세형 뒤만 쫓아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내일에 대한 걱정으로 침낭에 몸을 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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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에 C2에 올릴 짐을 대포해 놓는 날이다. 각자 텐트와 식량 등을 지고 아침 10시에 베이스캠프를 나섰다. 운행을 시작하는 그 심정이란. 정말 처음 가는 산을 오르는데 필요한 것은 막막함과 인내심이다. 오늘부터 비브람을 신어서 발도 편안하지 않다. 베이스에서 상위 캠프로 올라가는 길은 자갈과 흙길이었다. 베이스에서 300~400미터 정도 올랐을까, 눈앞에 보이는 큰 바위가 있는 곳까지 올라가니 저멀리 거대한 구릉이 보인다. 구릉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사람이 작게 보이는데, 그 크기만으로도 저 구릉을 오르는데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 짐작이 갔다.

길은 상태가 좋지 않다. 지반이 단단하지 않아 흘러내린다. 학재형이 우리를 먼저 지나쳐서 앞서가셨는데 상세형께서 학재형에게 오른쪽으로 가지말고 왼쪽으로 가라고 하셨다. 오른쪽 길은 완만하게 돌아나가는 길이고 왼쪽은 경사가 급했다. 상세형을 따라 왼쪽길로 따라갔는데 이내 곧 후회했다. 자갈과 흙이 불안정해 4미터를 가면 1미터 정도 흘러내려 길을 가는데 매우 힘이 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오르고 올랐다. 상세형께서 내가 보기에 더 길이 안좋은 왼쪽편으로 가시길래 나는 상세형과 떨어져 계속 오르던 길로 갔다. 학재형은 이미 멀리 보이는 구릉을 거의 다 넘어가셨다. 지쳐버리니 짐도 2배는 더 무겁게 느껴진다. 길이 좋지 않아 앉으면 흘러내려 쉴 곳을 찾아보았더니 30미터 위에 안전하게 쉴 수 있는 바위가 보인다. 힘들게 힘들게 그쪽으로 가서 음료수와 행동식을 까먹었다.

음식물을 섭취하고 나니 그나마 힘이 약간이나마 생긴다. 내 뒤에는 얼마되지 않는 거리에서 지훈이가 따라오고 있었고, 종팔이형과 지욱이는 멀찌감치서 올라오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올라오는데 많이 힘이 드나 보다. 사람들이 올라오는 것을 보며 쉬다가 다시 출발하였다. 올라오다가 밑을 보니 베이스 캠프가 어느 정도 까마득하다.

그때까지만 해도 C1이 어디인줄 모르고 있었는데 뒤를 돌아보자 캠프 캐나다가 뒤를 돌아본 시선 왼편에 보인다. 캠프 캐나다가 5000미터 고지 약간 넘어서는 곳에 있는데, 나는 난생 처음으로 5000m이상 고지에 처음 올라와 있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높이를 올라온 것이다.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렇게 천천히 올라왔는데 어느새 아래를 내려다보면 많이 올라와 있다. 하지만 위를 쳐다보면 여전히 거북이 걸음이다. 구릉이 얼마남지 않았을 무렵 상세형께서 운행 중지를 외치시고 더 이상 가면 안 되겠다고 짐을 대포시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텐트를 꺼내어 흘러내리지 않게 바닥에 놔두고 지욱이와 지훈이가 가져온 짐들과 같이 쌓은 다음 돌무더기로 우리 장비들을 가렸다. 장비들을 대포시키고 이제 내려온다. 길이 흘러내려 비브람으로 스키 타듯이 내려왔다. 이렇게 힘들게 내려온 길을 다시 내려간다니. 올라간 노력들과 시간, 체력이 너무 아까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려오는 것도 조심히 내려와야 한다. 내려오다가 두어 번 넘어지고, 비브람 안으로 모래들이 엄청나게 들어온다.

비브람은 신고 벗는 것이 매우 불편하여 모래들이 잔뜩 들어간 비브람을 그대로 참고 신으면서 내려왔는데 참는 것도 고역이었다. 그렇게 내려와서 텐트에 도착하자마자 비브람부터 던져버렸다. 하산 길에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기 시작하였는데 돌아오니 완전 폭설이 내린다.

부랴부랴 카고를 매트리스로 덮어 놓고 텐트 안에 들어갔다. 형들께서는 눈오는 장면을 사진촬영 하느라 신이 나셨다. 나는 피곤하여 밖으로 나가는 일은 최대한 자제하였다. 눈이 와서 저녁때가 되자 어제와는 다르게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내일은 C2까지 가야된다는 생각을 하니 또 내일 하루가 막막해지는 밤이다.

‘내일은 죽었다!’ 라는 생각과 함께 불편한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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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2까지 짐을 올리고 C2에서 잔다. 이것이 오늘의 계획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서밋 어택하는 날을 제외하고 오늘이 가장 빡센 날이다. 아침부터 내 표정을 밝지 않았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짐을 챙겼다. 오늘 C2까지 많은 짐을 올려놓아야 나중이 편하다. 학재형은 고소적응이 되었다고 가지 않으신다고 한다. 학재형이 미칠 듯이 부러워졌다.

아침을 먹고 바로 등반준비를 하였다. 10시 즈음이 되자 어제 그렇게 많이 내려 쌓였던 눈은 이미 녹기 시작한다. 워낙 날씨가 건조하고 낮에는 햇빛이 뜨거워 눈이 빨리 녹는다. 녹은 눈도 건조한 땅 아래로 급속히 스며들어 물도 고이지 않는다. 10시에 등반준비를 마치고 종팔이형께 다 같이 경례를 한 후 등반을 시작하였다.

어제까지 갔던 길은 이미 한번 가 본 길이라 가는 맛은 없었고 등반이 지루하고 그냥 힘들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어제 왔던 눈이 녹아서 지반에 스며들어 지반이 그나마 약간이나 단단해졌다는 것이다. 어제 눈이 온게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어제처럼 등반로 가 흘러내리거나 하는 일은 적었다. 우리 페이스가 느린 건지 다른 사람들 페이스가 빠른 건지 뒤에 있던 사람들은 우리를 다 지나쳐 간다. 마침내 어제 대포시켜 놓았던 짐까지 있던 곳으로 가서 텐트를 짊어지는데 짊어지는 순간 속으로부터 한숨이 나왔다. 짐이 매우 무거워진 것이다.

어차피 옮겨야 되는 것 지금 한 번에 다 안 옮기면 나중에 더 고생이라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짐을 졌다. 지금의 고통은 나중의 행복이다 라고 애써 생각하면서. 대포 시킨 곳에서 얼마 되지 않는 곳에 구릉의 고지가 있어 짐을 찾고 올라섰다. 그 구릉을 넘지 않으면 다음 길이 보이지 않는다. 아콩카과의 구릉은 처음 넘을 때마다 항상 기대에 차오르게 한다. 구릉을 넘으니 우리가 올라올 길들이 새로이 보였는데 새로운 길에는 눈이 별로 없었던(눈이 왔지만 낮의 햇볕에 많이 녹아서 없었다) 지나온 길보다 눈이 많이 쌓여있었고 저 멀리 새로운 구릉이 보였다. 그래도 많이 멀어 보이진 않았다.

그렇게 또 운행이 시작되었다. 중간에 학재형이 대포시켜두신 가스를 찾고 거기에 다시 짐을 대포시켜두고 올라갔다. 짐이 매우 무거워 상세형이 퍼진다고 학재형이 대포시켜 두신 가스가 있던 곳에 짐을 다시 대포시켜 두라고 하셨다. 텐트 2개중 1개를 거기다 두고, 라면을 두고 등반을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올라가던 중 갑자기 구름이 몰려와 눈보라가 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두 번째 구릉까지는 불과 높이로 50미터도 안 되는 거리였다. 하지만 우리는 캠프의 위치가 두 번째 구릉만 넘으면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눈보라가 치고 구릉을 넘었는데도 캠프가 없으면 상황이 위험할 수도 있어 상세형께서 비상으로 텐트를 치라고 하셨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경사진 눈밭에 텐트를 쳤다. 급하니까 대충 눈밭을 발로 갈아서 정리하고 5명이서 그 안에 들어갔는데 정말 경사지고 비좁아 죽을 맛이었다. 그 비좁은 곳에 들어가 눈을 녹여 김치국밥을 끓여먹었다. 처음 먹어본 김치국밥은 배가 고파서인지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시장에서 산 복숭아통조림을 먹었는데, 우리나라 복숭아 통조림보다는 맛이 없었다. 짜증나게도 날씨는 우리가 식사를 끝마치니 구름 한 점 없이 쨍쨍한 날씨로 바뀌어 있었다. 이대로 거지같은 곳에서 지낼 수는 없으니 텐트를 접고 얼마 남지 않은 구릉으로 올라갔다.

구릉에 올라가니 오른쪽에 미도 캠프가 보인다! 캠프에 도착한 것은 오후 여섯시 즈음이었다. 캠프에 올라가니 진짜 기진이 빠진 상태였다. 걷는 것도 힘이 들어 헉헉거린다. 나와 상세형이 먼저 도착하여 텐트를 치고 물을 떠왔다. 미도캠프에는 눈을 녹여먹어야 한다는데. 캠프 한 켠에 자그마한 호수가 있었다. 그 호수에서 물을 떠왔다. 5500미터 고지로 올라오니 날씨가 매우 추워져 보온에 각별히 신경 썼다. 떠온 물로 식사를 다시 하고 5명이서 비좁은 텐트 안에서 낑겨서 잤다. 매우 텐트가 비좁아 자는 것이 고문이었다.

피곤하여 자려고 누웠지만 잠을 잘 수가 없어 내내 빨리 아콩카과 등반을 끝내고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1/13

고소에서 맞는 아침. 늦게 일어나 맛없는 아침으로 기억되는 식사를 했다. 어제는 캠프에 도착하자마자 움직일 때 마다 두통이 왔었는데, 어제 타이레놀 한 알을 먹고 가만히 자서 두통을 경미하게 가라앉았다.

오늘의 일정은 C3근처까지 정찰했다가 베이스까지 내려가는 것.

몸 상태는 많이 나쁘지 않았다. 지욱이는 몸이 안 좋다고 호소한다. 상세형께서 나는 고글이 없으니 C3까지 가지 말고 오늘 지욱이와 함께 쉬라고 하신다. 내 몸과 정신건강과 눈을 위하여 알겠다고 말씀 드렸다. 지훈이와 재문이형과 상세형이 10시 반쯤 넘어 떠났다. 지욱이는 몸이 안 좋은지 바로 골아 떨어지고 나도 어제 잠을 제대로 못자서 많이 피곤하였다. 12시까지 자고 텐트 정리를 하려는데 11시 50분쯤에 선발대가 돌아온다. 아무리 빨라도 열두시 반 넘어서 올 줄 알았더니 일찍 운행을 종료하고 돌아왔나 보다. 재문이형한테 아무 일도 안하고 있다고 한소리 먹었다. 모두가 내려갈 채비를 하였다.

다시올라갈 때 짐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침낭을 모두 두고 간다. 에이 그깟 베이스에서의 밤 추위쯤이야 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내려갈 때는 금방금방 내려갔다. 어제 그렇게 힘들게 10시간 넘게 걸려서 올라온 길을 내려갈 때는 2시간 조금 넘게 걸려 내려갔다. 참으로 허무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내일 모래 다시 이 길을 올라와야 된다니. 내려가면서 짜증이 솟구친다. 다음번에 내려올 때는 꼭 정상을 찍고 마지막으로 내려온다는 각오를 다진다. 내려오니 종팔이형께서 어서 오라고 하신다. 종팔이형께 모두 경례를 하였다. 텐트에 도착하니 학재형께서 라면을 끓여주셨다. 속이 안 좋아 먹지 않으려고 했는데, 한입 먹으니 더 먹게 된다. 내려오니 언제나 그렇듯이 피곤이 쫙 밀려온다.

내일은 쉴 수 있다는 안도감에 잠을 침낭이 없어 춥지만 마음만은 편하게 잘 수 있었다. 위에서 비좁은 텐트에서 5명이 새우잠을 자다 드넓은 베이스 텐트로 오니 고시원에서 살다가 50평짜리 고급주택으로 이사 온 것 같다.

별 것도 아닌 것에 행복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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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푹 쉬는 날이다. 내일도 그저께처럼 C2까지 올라가야 하지만 무거운 짐은 다 올려버려 가볍게 갈 수 있어 부담이 훨씬 덜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걸 하루 종일 올라가야 된다는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