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 정상공격 날

새벽 네시 지훈이가 재문이형과 우리를 깨운다.

어제 새벽 그렇게 시끄러웠던 바람소리는 오늘 전혀 들리지 않는다. 바람소리가 들리지 않아 어제보다 잠을 더 잘 잔 것 같다. 아직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바람 부는 것만으로도 오늘 날씨는 일기예보와 정확히 일치한다. 일기예보대로라면 오늘 날씨는 바람도 없고 구름 없이 맑을 예정이다.

오늘 운행이 약간은 수월해지겠다는 안도감과 오늘 진짜 올라간다는 사실에 정상에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후련하였다. 새벽의 날씨는 어제처럼 엄청 추웠다. 일어나서 텐트를 건드리니 습기가 텐트에 얼어붙은 것들이 우수수수 떨어진다. 침낭에서 벗어나자 오늘도 여지없이 새벽의 베를린 캠프는 엄청나게 춥다는 것을 강제로 느끼게 된다. 추위를 참으며 옷들을 입고 형들 텐트로 갔다.

상세형은 피곤하셨는지 텐트 한켠을 떡 차지하시면서 누워 주무시고 계셨고 학재형과 지욱이는 식사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루가 연기되어 식량이 모자랄 뻔했는데 다행히 식량이 딱 맞는다. 밥을 하고 마지막 아침으로 순두부를 끓인다. 내가 베이스에서 혼자 출출할 때 먹으려고 꿍쳐온 마운틴 푸드 즉석 스파게티도 가져와서 물을 부었다.

순두부는 오늘따라 맛이 없었다. 물을 부어 먹는 스파게티도 물 조절 실패인지 맛이 기대했던 것보다 형편없었다. 순두부를 밥에 말아먹는데 구역질이 나왔다. 구역질이 나와 더 이상 먹을 수 없었다. 토가 나오려고 하는데 간신히 내리눌렀다. 더 이상 먹으면 진짜 토할것 같았다. 그걸 내색하긴 그렇고 해서 내 그릇에 담긴 순두부를 텐트 바깥에 버려버렸다. 식사가 끝나자 각자 텐트로 돌아가 최종 정상 공격을 위한 짐을 싼다.

정상공격을 하는 짐이래봤자 별게 없다.

영양보충과 무게를 최소화하기 위해 여느 때보다 푸짐한 행동식과 물병 2개를 어택에 달랑 들고 떠나는 것이다. 평소에 끼던 얇은 장갑을 끼다가 두꺼운 것으로 바꿔 착용하였다. 비브람에 스패츠를 착용하는 것도 평소와 다르게 꼼꼼하게 손이 간다. 스패츠를 신고 있는데 상세형이 멀리서 먼저 가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상세형께서 운행 시작 전에 다같이 모여서 파이팅이라도 하자고 하실 줄 알았는데 그냥 휘적휘적 올라가시는 걸 보고 당황해 언제나처럼 뒤에 붙기 위해 황급히 따라갔다. 어제 산책했을 때 갔던 캠프로 올라갔다.

이미 사람들이 등반을 시작하였는지 캠프는 한산하였고 앞에 남자 하나가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혼자 올라가는 모습이 고독해 보인다. 어제 들은 바로는 캠프 앞에 드넓게 펼쳐져 있는 구릉을 넘어 돌아가면 캠프 인디펜덴시아가 있다고 하였다. 인디펜덴시아는 6500미터에 있다고 하여 베를린 캠프에서 정상까지 해당하는 거리 중 절반에 해당하는 거리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등반이다. 머릿속으로 오늘 꼭 해낸다! 라고 각오를 다진 후 원정대장 상세형의 뒤를 따랐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보다 먼저 떠나서인지 길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러셀이 완벽하게 되어 있어 걷기 아주 편한 길이 만들어져 있었다. 게다가 경사도도 그리 급하지 않았다. 캠프 캐나다에서 보이는 구릉을 넘어 미도 캠프까지 가는 구릉. 그 절반정도의 경사도여서 완벽한 러셀의 힘으로 많이 힘들이지 않고 운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운행을 하고 있는데 뒤에 자꾸 지욱이가 처진다. 재문이형이 지욱이가 느리다고 처지면 안 된다고 지욱이에게 소리치는 소리를 듣고 알게 되었다. 상세형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시고 다시 운행을 시작하셨는데, 다시 재문이형이 지욱이에게 뭐라고 하자, 지욱이에게 내려가라고 하신다.

지욱이는 내 예상과는 달리 순순히 내려간다. 오늘이 거의 마지막 기회 일 텐데 이렇게 지욱이 혼자만 못 올라가는 건가 많이 안타까웠다. 1학년 전원 등반에 성공하는게 우리 동기들만의 목표였는데...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여권을 잃어버린 날 저녁 회의에서 상세형께서 지욱이에게 지금 영재 같은 상황에 처한다고 했을 때 너라면 불학실한 여권이지만 정상을 공격할 수 있는 기회와, 정상공격을 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여권 둘 중 어떤 선택을 하겠냐고 물어 보시니까 자기는 여권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었다.

운행한지 한 시간도 안 되어 내려가니 동기로서, 보는 입장으로서 많이 맥이 빠지는 상황이었다. 지욱이는 아직 우리 캠프와 가까운 곳에서 하산하여 혼자 하산하였다. 올라가면서 지욱이가 내려가는 뒷모습을 보니 천천히 내려가고 있다. 우리는 지욱이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운행을 계속했다.

중간에 학재형께서 아이젠을 착용하는게 좋겠다고 하셔서 가방에 지고 왔던 아이젠을 꺼내 신었다. 평소에 아이젠을 비브람에 끼우는 연습을 많이 했는데, 실전에서, 게다가 경사진 곳에서 아이젠을 착용하는 것은 처음이다. 오른쪽 아이젠을 착용하는데 마음먹은 것처럼 착용이 되지 않는다. 앞부분이 잘 끼워지지 않아 이탈이 난다. 내가 오른쪽 아이젠을 가지고 낑낑대는 사이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 착용하고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다. 재문이형이 나에게 와서 오른쪽 아이젠을 착용하는 것을 도와주셨다. 왼쪽 아이젠은 오른쪽 아이젠과 달리 속 썩이지 않고 한 번에 잘 끼워졌다. 아이젠을 신어 새로운 기분으로 운행을 다시 시작하였다. 아이젠을 신었으니 이제부터 아이젠 워킹을 하라고 형들이 당부하셨는데 처음 착용해본 느낌상 아이젠 워킹이나 비브람을 신고 걷는 것 두 개다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여쯤 가서 비교적 만만한 구릉을 올라가니 가려져 있던 새로이 우리가 올라가야 될 곳이 보인다.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사라져 시야가 탁 트여 시원하다.

두 시간 가까이 올라왔음에도 상세형은 운행을 계속하신다. 재문이형이 이제 좀 쉬었다 가자고 상세형에게 말씀드리고 나도 쉬었다 가는게 좋을 것 같다고 상세형께 말씀드렸더니 쉬자고 하신다.

행동식들은 차가워 맛이 없었다. 행동식 중 소시지는 내가 가장 좋아하던 것이었는데 오늘은 너무 차가워서 한입 먹고 봉지 속에 처박아 두었다. 녹았다 다시 얼은 초콜릿은 식감도 이상하고 맛도 없다. 아침식사도 그렇고 오늘따라 먹는 것이 고역이다. 우리가 쉬고 멈춰서 있는데도 우리를 지나쳐가는 사람은 거의 없고 앞에 가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우리보다 늦게 가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나보다.

다시 운행을 시작하였다.

길은 아직까지 괜찮다. 크게 힘든 경사도가 아닌 길이 처음부터 쭉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한시간 안팎을 갔을까... 인디펜덴시아가 보였다. 명색이 캠프이지 아주 비좁은 공간이었다. 예의 그 나무로 지은 큰 개집이 있고, 드럼통이 있었다. 드럼통에는 여행사들이 각자 물품을 넣어두는 곳인 듯 했다. 인디펜덴시아는 명색이 캠프이지 캠핑을 할 만한 곳이 못되어 보였는데, 그 증거로 텐트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비상 대피소 개념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인디펜덴시아에 도착하여 다들 암묵적으로 쉬고 있었는데 양놈 커플 둘이서 개집 뒤편에 앉아 서로 쪽쪽 뽀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그 양키 커플 두 명 때문에 기분만 잡쳤다. 특히 상세형께서 기분이 나빠하셨다.

인디펜덴시아에서는 봉우리가 두 개 보이는데, 하나는 아콩카과 정상이고, 하나는 이름 모를 봉우리이다. 인디펜덴시아에서 보면 그 두 개가 크기가 비슷해 보이는데, 하나는 작고 가까이 있고 하나는 크고 멀리 있어서 크기가 비슷해 보인다. 인디펜덴시아에서 바로 보이는 구릉을 넘어가면 저 멀리 아콩카과로 향하는 길이 멀리멀리 펼쳐져 있다.

길은 매우 좁은데 구릉을 넘고 등산로의 처음 약 100미터 정도는 눈이 쌓인 곳을 사람들이 러셀해서 그런지 경사도가 평지나 다름없다. 비로소 그렇게 안보이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저 멀리 보이는 마지막 봉우리를 오르기 위해 어프로치 하고 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베이스캠프가 보인다.

맙소사!

베이스 캠프의 텐트들이 점보다는 크지만 땅에 떨어진 콩알보다도 작게 보인다. 산의 경사도를 보니 60도 정도 되는 급한 경사였다. 하지만 눈이 쌓여 쌓인 눈을 밟고 사람들이 완만하게 산을 돌아나가면서 등산로를 만들어 나가니 힘겹게 오를 만 했다. 이때부터 눈이 구릉을 넘기 전보다 절반이상 많아진 느낌이다. 아콩카과는 원래 눈이 적어서 흘러내리는 정상부근에서는 눈 대신 주로 흘러내리는 자갈과 싸워야 한다던데 우리는 엉뚱하게도 눈과 싸우고 있다. 등산로를 따라 저 앞에 보이는 봉우리까지 어프로치 하는 데는 많은 힘이 들었다. 앞에 가는 한 남자는 힘에 겨운지 앞에서 쉬고 있다. 이때부터 사람들의 운행속도가 급격히 줄어든다.

일단 봉우리 근처까지 어프로치하는데는 눈과의 싸움이 제일 힘겨웠다.

구릉을 넘어 등산로에 들어온 지 거의 두 시간여 만에 드디어 봉우리 근처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평지가 드넓지는 않지만 충분히 있어서 사람들이 정상을 공격하면서 마지막으로 편하게 쉴 수 있는 곳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이 놔두고 간 배낭들이 수십 개는 보였다. 메고가기 힘들어서 여기다 두고 간 것이다.

지금 이 시간 다섯 시 정도 된다. 이때쯤에는 정상 공격을 성공한 사람이 하나둘씩 하산하기 시작하는 시기다. 지금 정상 부근을 보니까 수십 명의 사람들이 줄지어 정상을 오르고 있다. 여기서부터 길이 아주 험하다. 등산로가 봉우리 바위를 따라 직상하는 형식으로 짜여져 있다. 모두가 여기서 10분 정도 쉬었는데 학재형은 우리가 도착했을 때 우리보다 빨리 도착하신 후라 충분히 휴식을 취하신 후 출발하시고 상세형도 10분 쉬고 출발한다고 하신다.

나는 더 쉬고 싶지만 상세형 뒤를 쫓아갔다.

지훈이는 아주 천천히 등반을 하겠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내 뒤에서 그리 멀지 않은 5미터 정도에서 따라오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니 학재형// 상세형 나 // 지훈이 재문이형 이렇게 세 그룹으로 떨어진 형태가 되었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매우 험했다. 경사도 매우 급하고, 눈이 허리높이만큼 쌓인 것을 사람들이 러셀하면서 다져놓고 가는 형식인데, 길이 매우 좁고, 눈이 비정상적으로 파여서 다리를 크게 벌려 올라야 한다거나, 심지어 손을 짚고 올라가야 되는 구간이 속출한다. 이런 코스가 나오니 너무나도 운행이 힘들다.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 같다.

운행한지 거의 12시간이 되어가는 데도 이제는 제대로 쉴 수 없다.

이제 등반을 끝마치고 하산하는 사람들이 올라왔던 등산로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상세형께서는 등반을 끝마치고 하산하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정신이 투철한 분이시다. 자리를 양보하는데 패인 길 옆으로 올라서서 비켜주신다. 나도 상세형께서 시키는시는대로 상세형과 같이 길 옆으로 올라갔다. 고소등반에서 그러는 건 진짜 매우 힘든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등반을 끝마치고 하산하고 있었다. 하산자들이 계속 내려올 때마다 비켜주는데 그럴 때 마다 힘든 건 둘째 치고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하산자들과 만날 때 마다 정신적 육체적 피로감이 더해진다. 그래도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묵묵히 피켈을 눈밭에 푹푹 박으며 상세형 뒤를 따랐다. 위험한 길 때문에 피켈을 푹푹 박으면서 가야 그나마 약간 안심이 된다.

그렇게 무념무상으로 그저 굴러 떨어지지 않는 것에만 신경쓰며 힘들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앞에 빨간 옷을 입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의 경우처럼 한숨을 쉬며 길을 비켜주라는데 우리보고 내려가라고 한다.

자세히 보니 아콩카과 국립공원 레인저다.

무슨놈의 레인저들이 이리 떼거지로 몰려왔는지 대표로 보이는 놈 뒤에는 일곱 여덟명이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그말을 듣고 처음 든 감정은 황당 과 허무. 여권을 잃어버린 이후로 그렇게 묘하게 기분 더러운 감정을 오랜만에 느껴보았다.

제일 먼저 든 생각으로는 오늘 나와 상세형이 레인저 때문에 정상 등반을 못하게 되면 내일도 분명히 해피 서밋 어택 라이프가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기까지 얼마나 개고생하면서 왔는데,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내일이든 내일 모레든 여기를 내려가 다시 오른다는 생각을 하니 끔찍하였다. 가장 정신건강에 해로운 것은 예기치 않은 등반일수가 늘어날 거라는 사실이었다. 빨리 내려가 멘도사의 호텔에서 푹 쉬고 싶은데 이러면 안 되었다.

짧은 시간안에 이런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어떻게든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게 막아야 했다. 하지만 레인저들은 너무나도 단호하게 No! No!만을 외친다.

날씨가 안 좋아진다고 내려가라고 한다. 어떻게든 올라가야겠고 레인저들은 영어가 안통하고, 난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상세형께서는 산전수전 다 겪어본 몸이시다.

레인저가 내려가라고 해 약간 당황한 모습이셨지만 상세형께서는 엘부르즈에서 악천후로 인해 가이드가 하산해야 한다고 말리던 것을 묵살하고 올라가 정상을 밟으신 분이다. 레인저들에게 계속 노우 프라블럼을 외치셨다.

상세형과 레인저 모두 노우!노우! 만을 외치는 웃기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러시다가 영어와 한국말도 섞어 쓰시면서 레인저에게 항의하신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떠들면서 5분이 지나갔다.

내가 레인저들에게 위에 일행이 한 명있다고 그 사람을 만나야되기 때문에 가야된다고 하니 위에 몇 명이 있냐고 물어본다. 한명이 있다고 하고 아래에도 두명이 있다고 했다.

그때는 이미 레인저들도 우리를 포기한 눈치였다. 뭐라 뭐라 무전을 하더니 올라가는데, 일행을 만나서, 안전하게 다 같이 내려오라고 한다. 드디어 허락이 떨어졌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런데 얼마지나지 않아서 아래에서 재문이형의 고함소리가 들린다. 재문이형이 레인저들에게 붙들린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레인저 때문에 지훈이를 챙겨 내려가야겠다는 것이다. 상세형께서 안된다고 올라오라고 하셨지만 내려가야 되겠다고 한다.

오늘 최종 어택을 하면서 지욱이를 제외한 재학생들의 컨디션이 정상공격을 시도하는 5명모두 정상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갑자기 두명이 강제로 도중하차 하게 된 것이다. 아까 지훈이가 천천히 오겠다고 했을 때 웬만하면 힘들더라도 떨어지지 말자고 해야 했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지훈이와 재문이형은 내려간다. 등산로가 굽이지고 경사가 급하여 내려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재학생중 나만 올라가는 형국이다.

학재형과 상세형이 앞에 계셔 같이 올라가지만 을지로에서 아콩카과를 위해 준비하던 나날들이 생각이 났다. 뺑끼부리기 좋아하는 11학번 사이에서 홀로 07학번인 재문이형이 고생하던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원정준비하면서 서로 감정이 상해 싸우고 곧 다시 화해하면서 같이 일했었던 사람들과 같이 못 올라간다. 같이 올라가기로 했었는데....

정상에 올라가서 서로 축하해 주면서 서로의 휴대폰으로 사진도 찍어주고 얼싸안고 있는 모습을 또 학재형이 카메라로 찍어 주시고, 이런 것을 상상했었다. 정상에 선 순간을 위해 원정을 같이 준비하고 또 같이 해온 사람들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올라가야 한다. 고개를 들어 정상 봉우리를 보니 레인저들을 만난 자리에서 고도 100미터 정도 올라가야 했다.

종팔이형에게서 무전이 날라 온다. 잘 하고 있다. 절대 무리하지 않으면서 올라가라.

상세형과 나는 묵묵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등반팀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아콩카과는 정적의 산으로 변했다.

이 세상에는 나와 상세형 만 있다. 조심스럽게 한 발짝 한 발짝 위로 계속 위로 발을 올려놓으면서 오른다. 오로지 상세형의 등과 발자국을 보면서 올랐다.

머릿속에서는 지금왔던 것에 비해 아주 조금만 아주 조금만 가면 된다는 생각뿐이다. 마침내 저 3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학재형의 얼굴이 보인다.

학재형의 힘내! 다왔어! 라고 응원을 해주신다.

학재형의 전매특허 쉰 목소리가 산을 울린다. 정상 부근이 정말 가까이 다가왔다.

정상을 보니 오히려 눈은 없고 돌바닥 밖에 없다.

왜 여기에 눈이 쌓이지 않았는지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정상에 도착하였다.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상세형, 학재형과 함께 얼싸안고 방방 뛰었다.

<재문이에게 회기 등이 있었던 관계로 오클리의 기  만으로  만족해야 했슴 >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내가 있는 곳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다. 지금 나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다!

올라오고 나니 올라오지 못한 지욱이와, 재문이형, 지훈이 생각이 난다.

그들과도 기뻐하고 있었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내가 올라올 수 있었던 건 다 재문이형과 내 동기들 지욱이, 지훈이 덕택이다.

재문이형의 행정과 지욱이의 스페인어, 지훈이의 성실한 일처리가 아니었으면 올라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내게 해준 만큼 내가 해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뿐이다. 저 멀리 산 아래 안데스 산맥을 바라보니 뒤에서는 구름이 요란히 올라오고 있고 앞에서는 끝없이 펼쳐진 산맥들이 보인다.

아메리카 대륙의 땅 위 끝자락에서 보이는 풍경은 가슴이 탁 트이게 해준다.

<베이스로 내려와서 무사 등반완료를 축하하며,,,>